삼일 전엔 생일이었다. 한 해 내내 열중했던 패션 게임의 유저들에게서 수많은 생일 축하 디엠 메세지와 멘션, 댓글을 받았다. 아마 태어나서 받은 것 중에 가장 많은 축하를 받은 것이다. 올 한 해를 쏟아부은 노력을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
한켠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 그리고 이틀 뒤인 어제 데이식스 콘서트날 오전, 게임에서 만난 한 친구로부터 멘션을 받았다. 게임을 그만둔다는 소식이었다.
Suitu를 그만둡니다
이 게임을 뒤돌아서게 되었다는 걸 “공식적으로”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최근에 혼자 살 집으로 이사 준비를 하고 있고, 곧 고양이를 입양할 예정인데, 그러다 보니 제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함께 나눴던 대화들, 웃음들, 추억들, 그 모든 게 저에게 정말 큰 의미였어요.
모두 안녕
즐거웠어요
수초만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삶의 우선순위가 바꼈다는 말에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이틀 전 생일 축하를 받으며 느꼈던 마음 한 구석의 경멸감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부터 내 삶은 손쉽게 받을 수 있는 보상들로만 점철되어 있었는데, 삶의 우선순위가 자주 비틀리고 있었던, 외면하고 있던 현실을 한순간에 마주해버린 거다. 하지만 그 애처럼 가상의 업적들을 그만 둘 용기가 바로 나지 않는다. 그런 자신에게 또다시 미움이 들었다. 눈물이 났다. 엉엉 울었다.
게임 커뮤니티 서버를 관리하느라 밤을 샌 탓에, 회피하고 있었던, 바르지 못한 내 인생을 하필 오전에 마주한 탓에, 데이식스 콘서트장 앞에서는 내내 풀이 죽어있었다. 잘은 비를 맞으며 데이식스 팬클럽 부스에 줄을 서서 생각했다. 잘 살지 못하고 있다고... 잘 살지 못한 채 또다른 여흥을 위해서 데이식스 콘서트에 와버렸다고...
올 한 해에 대한 후회와 내 자신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차서, 케이크처럼 장식된 무대를 멍하니 잠시 바라보고 있었는데, 데이식스가 입장했다. 데이식스를 보고 있으니 눈물이 다시 났다. 그동안 너무 많은 시간들을 데이식스에 기대어서 지탱해왔다.
내가 이룬 많은 커리어들은 당연하게 데이식스의 덕이다. 9년 전부터 중요한 날엔 데이식스 노래를 들어야 잘 풀리는 징크스가 있다. 출근하는 매일엔 데이식스 음악을 들어야만 하루를 잘 보낼 수 있다. 데이식스를 보러 올 때마다는 생각했다. 앞으로 더 잘 살아야지. 데이식스로부터의 힘을 충전해서 나의 살이를 잘 꾸려가야지. 데이식스와 함께 성장하고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데이식스와 함께 걸어가는 것 같아서 매일 기뻤다. 데이식스가 드디어 빛을 봤을 때는 나도 데이식스처럼 꾸준히 길을 걸으면, 이타심을 애쓰면 보상을 받을 수 있으리라 믿음이 났다. 그런 믿음을 주는 게 더 고마웠다. 꾸준하지도 못했고 오롯이 이타적이지도 못했다. 데이식스를 보러와서 다짐했던 마음들이 부서져서 유리 파편이 바닥에 모두 늘어져있고 맨발로 걸어가야만 할 것 같았다. 데이식스와 함께 손을 잡고 걸어왔다고 생각했는데, 데이식스가 나를 제쳐 먼저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등을 보는 게 무서워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허무했다. 잘 살지 못했다. 첫곡은 <남겨둘게>였다.
<남겨둘게>는 2019년 Gravity 투어의 시작을 알린 Gravity 서울 콘서트의 오프닝이었다. 실내 체육관에서 처음 이곡을 들었을 때도 눈물이 핑 돌았다. 콘서트마다의 데이식스를 열렬하게 사랑하고 뜨겁게 응원하는 마음, 잘 살아야겠다는 다짐들을, 이 곡이 피로된 것만으로도 기억에 제일 잘 새길 수 있을 것만 같아서... <Gravity>는 <The Book of Us> 시리즈의 첫 앨범으로 <한 페이지가 될 수 있게>가 실려있는데, 첫 티저를 봤을 때부터 “이제 데이식스가 잘 될 거예요”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뭉클하고 넘치게 기뻤다. 그리고 이어진 곡은 <Better Better> 였는데, <남겨둘게>와 함께 <Every Day6> 프로젝트의 곡으로, 인생에서 가장 매서운 12월에 나는 <Better Better>를 들으며 이력서를 꿋꿋하게 써내어 첫 출근을 했다. 처음 데이식스의 콘서트를 나다닐 때 즈음에 가장 많이 피로됐는데, 데이식스와 이 곳에 함께 하고 있고 데이식스와 함께 꾸려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데에 가장 적격인 곡이었다. 그러니까... ...
그러니까 데이식스는 같은 자리에서 아직도 팬을 비롯한 주변인들을 응원하길 꾸준하게 하고 있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한결같이 지키고 있어서 감동이었다. 10년째 도운인 응원곡들에 온 힘을 실어서 드럼을 치고, 성진, 영현, 원필인 목청을 놓아 노래한다. 17년에도, 19년에도, 2025년에도 데이식스가 변함없는 걸 느낀다. 이번 콘서트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곡들을 차례로 피로하는 식이었는데, 꼬박 9년동안 보낸 모든 데이식스와의 시간들을 뒤돌아보는 것만 같았다. 매년 봄에는 <언젠가 봄은 찾아올 거야>를 들으며 봄내음이 나는 원필이 생일을 축하하기도 하고 생기를 띄어내고, 여름엔 <뚫고 지나가요> 앨범을 들으며 장마철을 이기고, 가을에는 <마치 흘러가는 바람처럼>을 들으며 슬픈 마음들을 춘 기운에 흘날려보내고, 겨울에는 <노력해볼게요>를 들으며 주변에 감사하고 따스하게 보낸다. 데이식스와 해를 나는 걸 깨닫는 게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는 걸, 열심히 걸어왔다는 걸 실감한다. 단지 올해를 내가 잘 살지 못해서 아쉬웠다. 훌쩍 멀어져서 데이식스의 작아진 등을 보는 게 무서워서 고개를 숙이고 걸었는데, 그런데, 곁을 돌아보니 내 옆에 있다. 힘들 때도 행복할 때도,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때도, 미움을 당할 때도, 깊이 상처할 때도, 나자빠진 순간에도, 꼭 나를 안아주는 것만 같다. 데이식스는...
허공에 허무를 쌓아올려 어떤 무너진 순간에도 괜찮다고 해주는 것 같다. 고작 게임에서 받은 생일 축하도 기쁜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다시 힘내면 잘 될 것 같다. 다시 잘 살고 싶다. 모든 것을 포용받는 기분... 그것이 내가 받은 데이식스에게서의 사랑이다. 아마 평생 갚지 못할 것이다.
10주년 기념 앨범인 <The Decade>의 <드디어 끝나갑니다>는 마치 동화의 마지막 장면을 상상할 수 있는 곡인데, '숨 막히는 모험 끝에' '바다를 건너 불길을 넘어 상처가 나도 이 악물고 버티고 살아서' 드디어 고난이 끝이 나고 주인공이 행복하다고 말해준다. 올 한 해는 이 곡을 들으며 상실감과 허무함을 이겨내왔다. 고생이 빛을 발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비로소 행복하고 싶다고... 그리고 2023년의 1월 1일 첫곡은 데이식스의 <무적>이다. 데이식스의 <The Book of Us> 시리즈의 가장 마지막 앨범 <Negentropy-Chaos swallowed up in love>에 실린 곡인데, 데이식스의 어떤 청춘을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다치고 상처하고 미숙한 우리들이 힘든 나날을 이겨내는 방식이 사랑이었어요’라고 얘기한다. 평론가의 ‘뻔하게 사랑으로 마무리한 데이식스’라는 평이 있었지만, 데이식스가 제일 진심으로 맞섰던 앨범이라고 생각해… 정말로 데이식스의 다정함과 사랑만큼 진실된 건, 날 일으켜주는 건, 그런 건 없는 것 같아.. 데이식스와 함께라면 내 인생도, ‘손을 놓지 않는 한’, ‘절대 부서지지 않는 무적’이 된 것만 같다.
조각난 마음을 이어붙여서 콘서트 다음날의 스케줄을 짜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리고 절대 다시 찾은 우선순위와 열정적인 마음을 잊고 싶지 않아서, 다시 잘 살아보고 싶어서, 허무해지고 싶지 않아서, 용기를 내고 싶어서, 콘서트에 다녀와 꾸밈이 없이 줄글을 제일 먼저 남겨두었다. 내 인생은 데이식스와 함께여서 그 어떤 것도 상처 하나 낼 수 없어, 라고 첫줄을 썼다.
2025.12


